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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진짜 사랑한다면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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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기사입력 2020-08-05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정착되어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친밀한 타인을 증가시키는가 하면, 가족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양상과 산업 구조까지 바꾸어가고 있다. 직장에서는 회식문화가 사라지고 40여 년 가까이 근무한 공직자가 퇴직하는데 송별회나 퇴임식도 안 하고 쫓기듯이 떠나는 모습을 본다. 반면에 온라인 접속 문화는 더 발달하고 인간은 일정한 거리를 둔 개별적 존재로 변해가기도 한다. 그것은 코로나 19의 극복을 위해서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문명의 입장에서는 반문명적이다. 왜냐하면 문명은 끊임없이 거리 좁히기와 접속을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코로나 19가 인간의 접속 본능까지 마비시키거나 왜곡하지 말기를 바란다.

 

연일 날아드는 중대본과 지자체의 코로나 19 확진자 발생 소식과 손씻기, 마스크 쓰기, 밀집 장소와 혼잡지 피하기, 가능한 개별 차량으로 이동하기 등 개인 위생관리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는 문자는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이들은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린 그것을 지켜야 사랑하는 가족과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이 시점에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시가 있다. 칼릴 지브란의 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이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1883〜1931)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류시화 엮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열린원>-

 

 

잠언 같은 시이다. 이 시는 칼릴 지브란의 다른 작품처럼 산문과 운문이 혼합된 느낌을 주며, 성경적 운율에 따른 경구와 비유를 담고 있다. 많이 알려진 그의 작품 『예언자』처럼 종교적 영감이 충만한 언어로 삶과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수칙을 추상적인 언어로 점진적으로 말하고 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왜 사랑하고 함께 있는데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 그래야 하늘 바람이 사랑하는 둘 사이에서 춤출 수 있다. '하늘 바람'은 무엇일까? 그것은 둘 사이에 깃드는 영감과 동경, 신비 같은 축복일 것이다. 그것이 사라진 사랑에는 욕망만 춤출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그 축복이 끼어들 틈을 두어야 사랑이 나와 너 사이에서 춤을 추게 할 수 있다. 춤추는 일은 함께 즐기는 축복이다.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사람들은 사랑하는 상대가 나와 일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의 발산일 수 있다. 사랑이 소유욕의 발산이 아니기 위해선 사랑이란 말로 구속해서는 안 된다. 진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상대를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로 존중하여야 한다. 구속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이 깃든 두 사람은 혼과 혼이 깃든 언덕이다. 언덕은 서로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존중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야 그사이에 출렁이는 바다가 생겨날 수 있다. 출렁이는 바다는 낭만이며 희망이며 신비이며 사랑의 노래이며 사랑의 희열이다.

 

시는 사랑에 대하여 더 구체적인 행동 수칙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사랑한다면 서로의 잔을 채워주고 서로의 빵을 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결코 한쪽 잔만을 마시지 말아야 하며 한쪽 빵만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일방통행이며 상대에 대한 배려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마시고 먹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명심해야 할 것은 서로는 혼자 있게 해야 한다.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다 보면 상대가 나와 일치되고 나와 똑같이 되고 나의 곁에만 있기를 바라기 쉽다. 그러면 사랑에 균열이 간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선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남겨두어야 한다. 

 

시에서는 사랑한다면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며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남겨둘 것을 거듭 강조한다. 현악기의 줄들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혼자 있으며 자기 고유의 소리를 낸다. 그 각자의 소리는 서로에게 다가가 어우러져 멋진 소리를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각자는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혼자 있으며 각자의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각자의 소리를 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어우러져 멋진 사랑을 꽃피울 수 있다. 그것이 각자의 존재 이유이며 사랑의 법칙이다. 그러기에 현악기의 줄들이 서로의 고유한 소리를 곁에 있는 줄의 소리와 화합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사랑한다면 서로 가슴을 주어야 한다. 가슴을 주는 일은 영감과 영혼을 주는 일이며 배려와 존중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러나 가슴을 주다 보면 상대에게 가슴을 묶어둘 수 있다. 상대의 가슴을 나에게 묶어 둘 수 있다. 그래서 서로의 가슴에 묶어두지 말도록 또 명심해야 한다. 만약 서로의 가슴에 묶어두면 현악기의 줄들이 하모니를 이루어 내는 멋진 소리 같은 멋진 사랑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로는 서로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서로는 절대로 서로의 가슴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의 법칙 위반이다. 서로의 가슴은 서로의 영혼이며 영감이며 사랑의 가슴이다. 그것을 간직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 “큰 생명의 손길”뿐이다. “큰 생명의 손길”은 누구의 손길일까? 시인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신”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는 자는 “큰 생명의 손길”뿐 이란 말은 겸허하란 말이다. 겸허하지 못한 인간은 생명과 영혼과 사랑이 마치 자기 전유물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 사랑을 깨뜨린다. 그러나 겸허한 인간은 생명과 영혼과 사랑이 자기 전유물이라 생각하지 않기에 끝까지 지킬 수 있다. 

 

서로란 존재는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존재이다. 이를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래서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듯이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고 또 강조한다.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참나무와 삼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이 키가 매우 큰 나무이다.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상징이며 사랑을 키워낸 존재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서로의 그늘은 간섭의 그늘이며 소유의 그늘이다. 한쪽이 한쪽을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소유할 때 다른 한쪽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며 성장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나머지 한쪽도 존재의 이유를 잃고 성장할 수 없다. 공존과 공동 성장을 위해선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 길은 존재의 고유성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을 지키는 길이다. 불간섭의 원칙을 지키되 서로에게 진한 사랑의 마음을 주라는 것이다. 

 

이 시는 앞에서 말했듯이 진정한 사랑이라 무엇이며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되 각자를 개별적 존재로 존중하고 그 특성을 인정해야 하며 배려와 동경과 분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겸허해야 한다. 개별 존재로서의 존재를 버리고 상대에게 의탁하거나 흡수하는 것은 배려와 동경과 분별과 신비가 상실된 행동으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불타는 것 같지만 얼마 못 가서 꺼져 버린다. 

 

서로 사랑한다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결혼한 연예인 남녀가 얼마 못 가서 파국을 맞이한 경우를 보도로 가끔 접한다. 그들은 대부분 헤어지는 이유를 ‘성격에 맞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언제는 서로 성격이 맞고 사랑하여 결혼하고 언제는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헤어진다는 이 모순은 무엇 때문일까? 이들은 바로 칼릴 지브란이 말하는 대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는 잠언을 새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사랑은 상대가 자기와 일치하고 자기를 100% 이해해 주고 자기만을 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랑은 상대란 존재의 존중과 배려이며 분별이란 사실을 인정하지도 깨닫지도 실천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겸허를 상실한 이기적인 소유욕이 발동한 때문일 것이다.

 

가끔 사랑한다면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결혼한 부부가 사랑을 빌미로 모든 비밀을 털어놓다가 파국을 맞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발상은 사랑하는 상대를 개별적 존재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존재를 버리고 나에게 들어오라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쌍방 구속이며 소유이다. 사랑하여 결혼한 둘이지만 서로에겐 서로만이 간직해야 할 비밀이 있다. 그것은 각자의 사이에 ‘신비의 바다’를 두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모든 비밀을 털어 놓으면 오해가 생기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 불신과 오해의 담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진짜 사랑한다면 함께 있되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것은 서로 간에 분별을 두는 정신과 행위이다. 분별은 서로의 존재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전통윤리인 오륜(五倫)에서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한 것도 부부간에 분별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부부간에 분별과 배려를 지키기 위해선 절제가 필요하다. 가까이하되 분별과 배려가 있고 이를 위해 절제가 있어야 사랑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

 

부부간의 문제에 대하여 좀 더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말한다. 마음과 몸이 하나라는 의미인데 그러다 보면 거리가 사라지고 문제가 생긴다. 지나치게 가까운 것은 지나치게 먼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의 법칙이 있다. 부부간에도 사랑을 오래 간직하려면 이심이체(二心二體) 되어야 한다. 서로 각자의 마음과 행동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다름을 바탕으로 하나로 화합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곧 존재의 존중이며 배려이며 분별이다.

 

호모사피엔스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문명화의 길을 걸어왔다. 문명은 한쪽에선 지혜의 발견이며 발전이지만 다른 한쪽에선 욕망의 실현이며 발산이다. 그런 문명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21세기의 인류는 세계가 이웃이라 할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몸과 몸도 부딪쳤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사랑의 거리보다는 욕망의 융합을 꿈꾸어 왔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 19의 재확산도 그러한 욕망의 융합을 꿈꾼 결과인지 모른다. 욕망의 융합을 꿈꾸는 곳엔 존중과 분별과 절제보다는 진한 욕망의 충족만이 춤추게 된다. 성경 속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퇴폐와 멸망 역시 성적인 욕망을 포함한 욕망의 충족을 위해 ‘거리 두기’를 버린 욕망의 융합을 꿈꾼 결과 빚어진 저주였다. 성경 속의 바벨탑 사건 역시 인간이 신과 가까워지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물리적 거리를 무너뜨리려고 쌓다가 빚어진 저주였다. 물리적 거리가 지나치게 사라지면 신비와 외경심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문명은 물리적 거리는 좁혀졌는데 이상하게도 심리적 거리는 멀게 했다. 전통 농경 사회에선 이웃 간에 친척 간에 물리적 거리가 있어도 마음의 기리는 좁았다. 그래서 진한 가족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해 왔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도시화는 물리적 거리를 최대한 좁혔지만 대부분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문명이 가져온 “심리적 담장 쌓기”는 많은 도시문제와 비인간화를 초래했다.

 

문명은 또한 인간과 자연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다. 반면에 마음의 거리는 멀게 했다. 인간은 문명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소유해 왔다. 그것은 자연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내 것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자연이 주는 신비와 경이로움은 잃어버리고 기후 온난화와 자연재해 등 재앙을 초래했다. 그래서 생태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최근에 쓴 책 『코로나 사피엔스』(최재천 외 6명 공저, 인플루엔셜)에서 ‘코로나 19를 포함한 창궐하는 바이러스는 인간이 자연 생태계를 침범하면서 시작되었다. 코로나 19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도 “화학 백신”이 아니라 “생태 백신”과 “행동 백신”이 필요하다. 생태 백신은 “자연과 인간의 거리 두기”이며 행동 백신은 “사회적 거리 두기”이다.’ 고 했다. 거리 두기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하며 분별할 줄 아는 절제있는 삶의 행위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것은 멀어지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각자를 개별적 존재로 존중하고 배려하라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 절제와 겸허를 실천해야 한다. 그때 사랑은 그것이 가진 신비와 동경과 아름다움을 지키고 계속 재생산될 수 있다. 지금 세상을 뒤덮은 코로나 19를 극복하는 길도, 많은 사람이 겪는 사랑의 파국을 막는 길도, 서로 간에 사랑을 신비와 동경처럼 끝까지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길도, 모두 “함께 있되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칼릴 지브란의 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를 다시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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