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검색

[시(詩)로 세상 읽기] 《나는 기형이에요》, 사랑 없는 성(性)을 규탄하는 절규

가 -가 +

이상호
기사입력 2020-07-01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두 달 전이었을까? 농장 마루 밑에서 들고양이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주변엔 다른 구조물과 주택도 있는데, 굳이 내 농장 마루 밑에서 새끼를 낳았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다행이라 여겼다. 어미 고양이는 내 농장이 새끼를 낳고 기르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것 같다. 

 

지금까지 고양이를 한 번도 길러본 경험이 없는 내가 어린 고양이 먹이를 사다가 매일 주자, 내가 농장에 가면 고양이 새끼들은 마루 밑에서 나와 놀면서 먹이를 먹기도 했다. 다섯 중엔 유독 약하고 어린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그 고양이는 불쌍하여 여러모로 더 보살폈다. 그 어린 고양이는 어미와 다른 고양이들이 떠난 지금도 농장에 남아 우리 부부를 기다린다. 

 

저녁 무렵이면 어미 고양이가 마루 밑으로 들어왔다. 새끼를 품고 자며 젖을 먹이러 오는 모양이었다. 어미 고양이는 아무리 가까이 하려 해도 경계하며 도망치듯 마루 밑으로 향했다. 그러면 모든 새끼 고양이는 마루 밑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때까지 멀리서 한참을 지켜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우람한 몸짓을 한 그 흰색 고양이는 아빠 고양이임이 분명했다. 아빠 고양이는 사방을 경계하다가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마루 밑에 들어가고 날이 저물어 질 무렵이면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것을 보며 고양이에게도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이란 강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물은 발정이 나면 종족 보존을 위해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으면 그만이라 여긴다. 그래서 동물의 성교를 종족보존의 본능에만 의존한 사랑과 소통이 없는 성교라 하여 교미라 칭한다. 그러나 내가 본 마루 밑에 새끼를 낳은 그 암수 고양이의 교미는 사랑의 나눔이었다. 어미 고양이뿐 아니라 자기 후손의 안전을 위해 매일 먼발치에서 망을 보는 아빠 고양이의 그 성교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그러나 두 딸을 8년간이나 성폭행한 친부, 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가두어 숨지게 한 계모, 성폭력과 살인 등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르는 사람들, 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성행위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서는 영장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성적 자유가 확대된 문명사회에서 인간만이 누리는 성적 특권을 오로지 욕망 충족의 도구로만 활용함으로써 수많은 기형을 탄생시키고 그 기형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며 살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아픈 현실에서 고양이 부부의 새끼 고양이 사랑을 보면서 떠 오른 시가 있었다. 천수호의 《나는 기형이에요》였다. 

 

 

나는 기형이에요 

천수호(1964〜 )

  

아이의 주먹에 붉은 꽃이 피었다 

너무 가까운 것에서 사랑이 찾아오면 

꽃이 몸에 와 핀다 

꽃이 몸을 가질 때는

내밀한 근친의 비밀이 씨방에 묻히는 법? 

겹겹이 싸인 봉우리 오므리며 

어느 미궁의 밤을 추억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꽃은 더 솔직하다 

암술이니 수술이니 

갖춘꽃이 난장을 트는 봉우리 속 

혀를 빼문 어미가 죽고 

징글징글해진 아비가 죽고 

홀로 남은 아이는 어쩔 수 없어 

두 주먹 불끈 쥐고 필사적으로 꽃잎을 벌린다 

꽃과 잎과 줄기들, 안간힘으로 뒤틀린다 

 

-<천수호『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2009>-

  

소통의 시인, 아니 소통을 갈구하는 시인 천수호의 첫 번째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2009)에 실린 시이다. 천수호 시인은, 문명사회의 현실에서 버려지고 소외된 존재들을 예리한 눈으로 파고들어 그 실체와 아픔을 해부해 나간다. 그리고 그 존재들이 말하게 함으로써 파렴치한 인간에게 일격을 가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천부적인 도덕률까지 자유와 유희라는 이름으로 짓밟아버리는 사람들에게 ‘그래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다. 

 

분노하는 “아이의 주먹에 붉은 꽃이 피었다” 분노가 얼마나 컸으면 붉은 꽃이 피었을까? 세상에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가 너무도 많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사랑이 찾아오면” 비정상적인 사랑이 된다. 왜일까? 너무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근친이다. 근친 간의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닌 상간(相姦 incest)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상간(傷姦-sexual violence)인 폭행이다. 

 

그래서 “꽃이 몸에 와 핀다.” 꽃은 원래 몸이 피워야 하고 몸이 꽃을 가져야 하지만 꽃이 몸을 가진 것은 비정상이요 기형이다. 거기엔 “내밀한 근친의 비밀이 씨방에 묻히는 법?”이다. 그렇기에 기형의 아이는 분노의 주먹에 붉은 꽃이 피게 할 수밖에 없다. 

 

근친의 비밀은 “겹겹이 싸인 봉우리 오므리며 어느 미궁의 밤을 추억”할 뿐이다. 근친의 비밀은 겹겹이 쌓이고 쌓일 수밖에 없으며 미궁에 빠진 상간(傷姦-sexual violence)의 밤을 추억할 뿐이다. 그러기에 겉으로 드러내기가 차마 힘든 고통의 강물 깊은 곳에 잠길 수밖에 없다. 

 

전해지는 유전적 상식에 의하면 근친상간이나 잘못된 관계에서 출생하는 아이는 기형일 확률이 높다. 그것은 탄생 자체만 기형이 아니라, 삶 자체도 기형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탄생 자체가 정당하지 못한 아이에겐 삶 자체도 기형적으로 주어지기 쉽다. 그런 아이의 삶은 버려지고 뒤틀리며 이상한 이름으로 규정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몸은 정상이지만 마음과 삶은 기형일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사랑에서 태어난 기형아보다 더 처참한 마음과 삶의 기형아가 되어간다. 

 

야만적인 욕망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살아나 “어둠이 깊을수록 꽃은 더 솔직하다” “암술이니 수술이니 갖춘 꽃이 난장을 트는 봉우리 속”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어둠은 은밀함이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깊은 수렁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는 욕망 충족의 난장판이 되고 누구에게는 공포의 도가니가 된다. 한 가족이나 한 혈육이 사랑의 둥지를 트는 일이 꽃에는 허용되지만, 인간에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간혹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운명을 꼬이게 하고 수정된 씨앗의 생명과 삶을 기형으로 만든다. 

 

그래서 어찌 될까? 파멸이 다가온다. 어미는 기가 막혀 “혀를 빼물고” 죽는다. “아비는 징글징글하다. 그 아비도 죽는다. 이제 “홀로 남은 아이는 어쩔 수 없어 두 주먹 불끈 쥐고 필사적으로 꽃잎을 벌린다” 그리고 세상으로 홀로 나선다. 그때 “꽃과 잎과 줄기들, 안간힘으로 뒤틀린다.” 근친상간의 후유증은 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가족과 친족 관계의 파멸이다. 모두가 뒤죽박죽된다. 정상적인 것은 파괴된다. 비극은 탄생한다. 

 

이 시는 근친상간(近親相姦-incest)이란 단어로 기형적인 성을 추구하는 인간을 고발하지만, 저변에는 사랑이 결여된 욕망만을 추구하려는 모든 성적 욕망을 규탄하고 있는 것 같다.

 

식물이 수정하여 꽃을 피우는 것은 종을 이어 영원한 생명의 윤회를 향하는 섭리의 실현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사랑의 꽃 피움은 단지 생명의 윤회를 위한 씨앗 얻기 이상이다. 그리고 꽃을 피우기 위해선 정상적인 환경과 관계가 주어져야 하며, 그 가운데 정당한 씨앗을 맺어야 한다. 그리고 그 씨앗이 올곧게 영글 때까지 그 책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무엇이 작용했기에 그 규칙과 섭리를 파기하게 했는가? 

 

근친상간이나 그로 태어난 아이는 이미 천형(天刑)이다. 비정상적인 성적 욕망의 충족 또한 기형이다. 비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난 아이는 버려지는 일이 많다. 부모가 이혼하고 재혼하며 버려지는 아이가 점점 늘어나는 세상이다. 그것뿐인가? 미혼모가 늘어나고 감당하지 못해 베이비 박스에 두고 간다. 베이비 박스가 넘친다. 그래도 베이비 박스는 다행이다. 아예 버리는 경우도 늘어난다. 이것 또한 기형의 탄생이며 기형적 삶의 출발이다. 성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이런 기형은 늘어난다. 

 

신은 인간에게 동물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랑과 성의 자유를 주었다. 인간은 자유란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 성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특권을 지녔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자유보다는 욕망의 자유 충족인지 모를 때가 많다. 욕망의 자유라도 좋다. 욕망 충족의 자유 이후엔 책임과 분별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두 딸을 하나는 8세 때부터 하나는 16세 때부터 8년간이나 상습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친부에게 징역 30년의 중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딸을 성폭행할 때 비타민 주사라 속이며 마약까지 투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단죄되었지만, 두 딸의 인생은 완전히 파괴되고 뒤틀어진 기형의 삶일 수밖에 없다. 그 아버지에겐 사랑이 아닌 기형적인 욕망만 존재했다.

  

근친상간(近親相姦-incest)은 기형적인 욕망의 성(性-sex)이다. 거기엔 사촌 간에 혹은 친척 간에 쌍방의 합의되거나 일방이 수용한 불륜도 있을 수 있지만, 거의 전부는 욕망 충족을 위한 일방폭행이다. 그래서 근친상간은 대부분 근친상간(近親傷姦-sexual violence)이다. 그것이 부녀지간일 때는 천형(天刑)이다. 거기엔 욕망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욕망 앞에 이미 죽어버린 시체가 된다. 

 

9세 의붓아들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숨지게 한 계모에게 살인죄가 적용되었다. 계모는 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가두고도 모자라 위에서 뛰기도 했다. 이에 남편이 방조나 동조를 했는지도 수사 중이다. 혀를 찰 일이다. 왜 그랬을까? 그 계모와 남편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재혼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는 사랑이 아닌 기형적인 욕망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래서 욕망 충족에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처의 자식은 욕망의 장애물이었는지 모른다.

  

미혼모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 미혼모는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유는 미혼모가 양육하는 아이 때문이다, 그래도 미혼모의 자녀는 기형적이긴 하나 어머니가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미혼모가 여러 사연 때문에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거나 베이비 박스에 두고 간다. 베이비 박스를 거쳐 간 아이들은 대부분 입양되거나 양육원에 맡겨진다.

  

베이비 박스를 운영하는 주사랑교회 이종락 목사에 의하면, 미혼모는 계속 늘어난다.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두고 가는 엄마들은 부모에게조차 임신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혼자 아이를 낳는 10대 소녀가 많다. 이종락 씨는 그 어린 엄마에게 “너는 지금 아이를 버리러 온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온 것이다. 넌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만큼이나 엄마를 살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2020.3.6.) 그래야 미혼모와 그 아이들이 기형의 삶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동을 학대하는 계모든, 계부든, 친부모든, 미혼모든, 그 저변에는 왜곡된 사랑의 욕망이 존재한다. 진정한 사랑은 결과까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엔 참된 소통이 깃들어 있다. 소통이 부재한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지만, 일시적인 사랑이거나 욕망 충족에 불과하다. 또 진정한 사랑엔 절제가 깃들여야 한다, 절제가 깃들지 않은 사랑은 무분별하고 책임지지 않으며 한계를 넘어서고 만다. 절제가 있어야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의 산물인 자녀를 보살피며 참게 된다. 절제가 없기에 사랑의 산물에 책임을 지지 않고 떠나간다, 그러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으로 퇴색한다. 사랑이 끝까지 진정한 사랑으로 남기 위해선 사랑에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을 통해 사랑이 욕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혼과 재혼을 누가 탓하랴. 이혼은 사랑의 필수요건인 소통과 절제의 부재로부터 발생한다. 소통과 절제가 사라지고 각자의 욕망이 증가할 때 사랑은 파국을 면치 못한다. 이혼한 남녀가 재혼한다면 그 안에 둘의 소통이 존재했다. 소통이 있었기에 뜻이 융합되었고 몸과 마음을 합쳤다. 그렇다면 둘은 사랑하며 쌍방이 가진 것들도 존중해야 한다. 계부와 계모로서 상대방의 자녀를 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재혼은 소통이 없는 욕망의 결합일 뿐이다. 

 

욕망 과잉의 시대가 왔다. 특히 신이 부여한 성적 자유가 최대화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어쩌면 성경 속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성적 욕망의 끈적임이 아이들의 핏속까지 파고드는 시대가 오는지도 모른다. 욕망에만 함몰된 성을 많은 사람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나는 성적 욕망충족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떠나야 하며, 그 성적의 욕망이 소통과 절제가 깃든 사랑의 산물이기를 바랄 뿐이다. 

 

성적 욕망의 충족이, 사랑의 자유라는 착각이 확산될 때 세상엔 《나는 기형에요》를 외치는 아이들이 넘쳐날 수 있다. 이제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 사랑은 성적 욕망의 충족에도 소통과 절제가 깃들 것을 요구한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하고 정치는 득표에만 매몰되어 허우적댄다. 욕망 충족만 부르는 성적 자유와 퇴폐적인 자본주의는 성폭력과 이상한 성문화를 키워간다. 이태원 게이(Gay) 축제 발 코로나 19 확산 이후 소문에 의하면, 동성애란 이름으로 은밀하게 자행된 이상한 성행위는 동성애가 아닌 퇴폐행위이다. 그래도 일부 정치 세력은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왜일까? 문명과 자본에 대한 성찰이 없는 득표에만 몰입하는 정치가 한몫을 한다. 

 

성적 욕망의 추구, 진보하는 문명, 성장하는 자본에도 성찰이 필요하다. 그 성찰은 소통과 절제로 일탈을 방지한다. 그것은 신의 섭리이며 우린 그 섭리를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신은 인간에게 성의 자유와 욕망의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이 퇴폐적이거나 폭력으로 흐르는 것까지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 없는 성적 욕망 충족의 자유가 난무하는 세상에선 고양이 부부만도 못한 인간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퇴폐와 폭력을 양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기형이에요》라며 사랑 없는 성(性)을 규탄하는 절규를 함께 들었으면 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최신기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 뉴스파고.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