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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한국 시단(詩壇)의 거성(巨城)을 무너뜨린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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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2019-06-17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사례는 많습니다. 한동안 나라를 휩쓸었던 미투운동은 잘 나가던 정치인 안희정, 한국 시단의 거성(巨城)인 고은, 연극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이윤택 등을 하루아침에 추락시켰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사람은 누구나 선한 자신과 악한 자신이란 내부적 모순이 갈등하고 있으며, 악한 자신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고은(1033~ )에 대한 김명원(1959~  )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한국문단에서 '문화자치국의 절대 군주'였습니다. 그를 무너뜨린 시 《괴물》을 보면,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괴물' 같은 관행화된 악한 의식과 습관을 다스리지 못하고, 죄의식없이 행동으로 표출시켰던 것입니다.

 

이글의 제목에서 거성을 한자로 거성(巨星)이라 하지 않고 거성(巨城)이라 한 것은 고은 시인이 한국 시단에서 큰 성(城)을 쌓은 것은 사실이지만, 시적 언어와 정서가 거성(巨星)이라 부를 만큼은 아니라는 평소의 생각 때문입니다. 최영미 시인의 그 《괴물》을 읽어보겠습니다.

    

괴물<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벨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황해문학 2017. 겨울. 128쪽>

    

위 시는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부의 성폭력 고발로 미투 운동의 불을 지폈던 시기에 한국문단에 미투 운동의 불씨를 붙인 시입니다. 최영미(1061~  ) 시인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이 시에 관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녀가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2017년 겨울 황해문화사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시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하다가. ‘내가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내가 작가가 아니다. 내가 정말 가장 중요한 한국문단의 문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현실과 문학 작품은 별개다’ 이에 대해 고은 시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0년 전에 어느 출판사 송년회에서 여러 문인이 같이 있는 공개된 자리여서 술 먹으며 격려하느라 손목도 잡고 했던 것 같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오늘날 비추어 희롱으로 규정된다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뉘우친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최영미 시인은 ‘구차한 변명이다. 그는 상습법이다.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목격했고, 내가 피해를 봤다... 권력을 쥔 남성 문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면 그들은 뒤에서 복수 한다. 그들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가 있다. 요구를 거절한 여성 문인에겐 시 청탁을 하지 않고 그의 시에 대해서 한 줄도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권력화된 문단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이후 고은과 최영미의 공방은 이어졌고 고은은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는 시적이라기보다 고발적 의미가 강합니다.

    

『괴물』은 무엇입니까? 사전적으로는 괴상하게 생긴 물건, 괴상한 사람이나 물건을 얕잡아 부르는 말입니다. 상식을 벗어난 모습이나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기도 하지요. 2006년 7월 27일 개봉하여 2006년 9월 2일, 개봉 38일 만에 1237만 8366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왕의 남자》를 제치고 역대 흥행 1위에 올랐던 영화 《괴물》(怪物) 역시 괴상하게 생겼습니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도 2000년에 발생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을 동기로 기획․ 제작된 고발 영화입니다. 괴물은 출몰하여 행동하는 순간, 두려운 존재입니다. 알베르 카뮈가 ‘모든 문학은 시대성을 초월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모든 문학은 시대를 고발합니다. 특히 문학은 은유적 언어로 시대를 고발하지요. 시인의 예리한 눈과 마음은 시대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시적 언어로 고발합니다. 그런데 시『괴물』은 상당히 직설적인 고발 시입니다.

    

위의 시에서 En 선생은 삼십 년 선배, 100권의 시집, 몸집이 커진 괴물, 노털상(노벨상을 은유한 말) 후보 등을 보면, 분명 고은을 가리킨다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습니다. 2017년 2월 6일 시인 류근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최영미의 시 『괴물』의 당사자가 고은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폐이스북에 “몰랐다고? 놀랍고 지겹다. 60~70년대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 (...)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대가의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분명 괴물은 고은이며 한국문단의 고질적 권력 구조와 아부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 『괴물』은 고은 시인의 젊은 여자들을 상습적으로 만지는 못된 습관으로 그녀가 힘없고 연약했던 문단 초년생 시절에 당하여 가슴앓이했던 잠재적 분노가 미투운동이란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분출한 것입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는 En 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지만,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 옆에 앉았다가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는 그녀는 문단 초년생이기에 앉을 수밖에 없었던 모순을 지녔습니다. 사실 문단 중년생들은 En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여유와 지위를 터득했다고 보아야지요. 틈만 나면 젊은 여자를 만지작거리는 En에 대한 분노는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 자리에서 폭발했습니다.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이 교활한 늙은이야!” 외쳤지만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았기에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는 그게 유일한 항변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그녀가 보기에 En의 시는 똥물입니다. 사실 고은은 하룻밤에도 수 편의 시를 쓸 수 있었다고 스스로 말하였거든요. 그러니 En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듯 시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가 바로 똥물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En이 없는 자리에서는 En을 씹어대지만, 정작 그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소설가 박 선생도 권력 앞에 비굴한 모습이었지요. En은 그만큼 몸집이 커진 괴물이었기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류근이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대가의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 것처럼, 많은 이들이 권위의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누가 한번 유명해지면 그가 말하는 욕설도 때로는 명언으로 포장되지요.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권위의 성을 쌓기가 어렵지 한번 쌓고 나면, 권위의 우상으로 대중을 농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보기에 En의 시를 읽으며 찬양하는 상당한 독자들도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입니다. 똥물은 En의 시이지요. 두렵습니다. 만약 그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자신은 이 나라를 떠날 것이라 합니다. 더러운 세상을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기에 떠나는 것이지요. 도피란 방어기제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사회가 키운 괴물을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를 고민합니다.

    

En은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는 권력을 가진 괴물입니다. 사실, 권력을 키우는 것은 권력자 자신의 능력도 있지만, 상당 부분 대중입니다. 히틀러의 광기 어린 만행도 초기의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가 한몫했지요. 권력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 강해질수록 권력의 성(城)을 쌓고 즐기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리고 부패 되어 가지요. En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잘못된 줄도 모르고 즐겼으며,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그의 천재성의 성령의 손길?, 소탈함으로 미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괴물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내부에 존재하는 이중적 특성을 성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늘 자기 내부의 악마적 특성이 부패 되는 줄도 모르고 관행적으로 즐기지요. 시에서 말하는 En도 그런 권력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이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영미 시인과 고은 시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최영미 시인(1961년 9월 25일 ~ )은 잘 알려졌던 시인입니다. 그녀의 첫 시집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나오자마자 ‘언어의 대담성과 섬세함으로 삶을 응시하는 신선한 리얼리즘의 구현’이란 평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굳혔지요. 그러나 한동안 대중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최영미는 첫 시집이 너무 성공한 탓에 문학 외적인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1992년 등단 이후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 미술과 축구에 대한 산문 등 시와 소설, 에세이를 넘나들며 5권 이상의 시집을 펴냈습니다. 그녀 역시 여느 가수나 작가들과 같이 첫 작품의 큰 성공 탓에, 후속 작품에 대한 강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1981년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반독재 투쟁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던 그녀는 현실에 대한 강한 직시의 눈을 가지고 풍자적인 언어로 인간의 모순을 파헤친 시집 《돼지들에게》로 2006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당시 이수문학상 심사위원이었던 유종호 교수는 “최영미 시집은 한국 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 이유를 구현한다”라고 했고 신경림 시인은 《돼지들에게》의 추천사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 없이는 이와 같은 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칫 관념적 교훈적으로 될 수도 있는 알레고리적 방법이 시에 활기와 재미를 더해주는 점도 주목을 끈다”라고 썼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시는 사회와 인간 내부의 고발 성격이 강합니다. 《괴물》도 한국문단의 고질적인 내부모순을 고발한 것이지요.

    

En이 누구입니까? 고은이 누구입니까? 김명원 시인의 시인과의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김명원, 도서출판 지혜, 2014)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한국문단에서 “문화자치국의 절대 군주”였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거대한 성안의 성주(城主)가 되었지요. 그런 성주를 최영미 시인은 용기 있게 고발한 것입니다. 시인 김명원은 앞의 책에서 고은을 이렇게 평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시인이 있다. 해설이 오히려 사족이 되는 시인이 있다. 고은 시인이 그러하다. 그는 온 생애를 문학에 경주하며 경이로운 문학사를 이룩했다. 그리고 접해 본 적 없는 기이한 기벽뿐만 아니라 인생 또한 특이하여 더욱이 그를 명성이 자자한 유명 문인으로 등극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전제주의하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집필과 시위를 통해 온갖 연행과 구구금, 고문과 구속 등을 당하며 행동하는 문인의 표본으로 상정하였고, 작품들 중 상당수는 독재정권으로부터 불온으로 낙인찍혔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질 때면 후보자로 거론될 만큼의 문학적 역량을 세계가 인정하기까지 그는 피 흘리는 고뇌의 생을 움켜쥐고 있었던 까닭이다.”

    

김명원은 “고은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겪은 후 정신적 충격으로 자살시도, 교사로 재직, 출가 및 환속, 등단, 가택 구금,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 노벨상 거론 등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길을 그는 단숨에 걸어왔다.”고 평하였고, 김현은 그를 ‘가면의 마술사’라고 하면서 “그 가면은 미지의 부인을 수없이 얻고 버린 자의 비애가 젖은 허무감과 동반하여 나타난다.” “그는 나의 이해를 초월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1986년 시작하여 25년간 집필하여 2010년 완간한 30권의 『만인보』는 그의 문학의 완결판이라고 합니다. 시 4000편에 등장인물이 5천 600여 명에 이르는 만인보의 대기획을 두고 최원식 교수는 “박자크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했는데 『만인보』는 우리 호적부와 겨루는 것”이라 하였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  The New York Review of Books』sms “20세기 세계문학의 최대기획”이라 했으며, 프랑스 시 전문지 『포에지』 편집위원인 클로드 무샤르는 “또 하나의 방대한 작품인 빅토르 위고의 ‘세계의 전설’을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2005년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는데 스웨덴에서 외국 번역본 특히 시집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김명원 위의 책 27쪽 참조) 이쯤 되면 그의 문학적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대단한 성주(城主)가 하루아침에 추락합니다. 사실 그에게는 독보적인 문학 열정 뒤에 숨겨진 관행화된 악마적 습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젊은 여자를 마구 만짐’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즐겼던 모양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내면에 ‘착한 나’와 ‘악한 나’라는 두 가지의 ‘나’가 존재합니다. 이 특성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양가적 감정이라 합니다. 두 존재는 늘 내부에서 싸우며 외적 동기를 만나면 표출되기도 합니다. 자의식과 내면적 성찰이 강한 사람은 ‘악한 나’의 표출을 누르고 ‘착한 나’가 표출되도록 하지만, 사람이 권력의 성안, 권좌에 있으면 그 악한 감정이 악한 것인 줄도 모르고 표출하도록 하고 악한 행위를 즐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고은의 그 만지는 행위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투 운동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의식 변혁 운동입니다.

    

첫째, 미투 운동은 비정상의 정상화 운동입니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미투 운동은 혁명의 물결입니다. 촛불혁명으로 촉발된 각종 억눌림과 비정상의 정상회복 운동은 곳곳에서 나타났지요. 이를테면 적폐 청산, 갑질 반대 운동, 미투 운동 등은 비정상의 정상화 운동이며, 억눌렸던 감정이 출구를 찾아 표출된 것입니다. 이런 운동은 사회적 관행으로 용인되었던 행동과 사고에 대한 삐딱선입니다. 그 삐딱선은 기존의 모순에 대한 부정의 연속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가는 것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관행의 파괴와 새로운 관계 질서의 구축이지요. 그런데 안타깝습니다. 원래 사회의식과 제도 등 총체적인 변혁과 발전은 부정(否定)의 연속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가는 합(合의) 세계를 도출해야 합니다.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법칙이지요. 그런데 정(正)에 대한 반(反)은 있었는데 합(合)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은 새로운 이념과 행동으로의 전환적 창조인데 그것들이 쓰나미처럼 스쳐 갔을 뿐, 합으로의 이행 전에 수면에 가라앉은 것 같습니다. 미투 운동은 혁명의 첫 단추에 불과합니다. 운동이 혁명으로 성공하려면 새로운 옷을 만들어 입고 모든 단추를 끼우고 의관을 갖추어야 완성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혁명은 혁명 이후에 그 이념과 정신의 확립을 향한 합리적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쓰나미 같은 물결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그 운동들이 제대로 정립되기도 전에 방향을 잃고 방황하거나 침전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미숙아를 그대로 두는 일입니다.

    

둘째, 미투 운동은 여성으로서의 자기 혁명 운동입니다. 미투 운동의 고발자는 여성으로서 당한 것에 대한 수치심으로부터의 해방선언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지요. 하나는 최영미 시인의 《괴물》처럼 사회적 분위기의 성숙입니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분노가 미투 운동이란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표출된 것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고발자 스스로 수치심의 멍에로부터 탈피하는 용기입니다. 서지현 검사나 최영미 시인은 수치심을 딛고 서는 내적 동기인 고발자의 용기를 지닌 것이지요. 그것은 자신의 수치심의 껍질을 벗기는 자기 혁명의 선봉에 선 사람이기도 합니다.

    

셋째, 미투운동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의 확보입니다. 촛불혁명, 갑질 반대 운동 등과 함께 우리 사회의 문명의식과 민주 의식의 성숙을 말해줍니다. 문명과 민주 의식의 발달은 자유와 평등 특히 인권의식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인권의식의 성장은 스스로 인간적 대접을 받기 위해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투 운동은 여성으로서의 자기 몸과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확보 운동의 하나입니다. 자기 몸을 만지고 성적 행위를 함에 자기 의사에 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성적 자기 결정권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성이 사랑을 위해서나 어떤 이유에서나 자기 의사에 의해 성적 자기 결정 없이는 몸 만짐의 허용과 성적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미투 운동은 여자들에게 관습적으로 씌워진 강요된 수치심의 해방운동입니다.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성폭력을 당했더라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지요. 세상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몸가짐을 잘못해서, 오죽하면, 뭐 잘했다고, 창피하지도 않나, 정조를 읽은 여자란 낙인 등으로 강요된 수치심은 피해 여성을 더욱 가혹하게 ‘피해의 우리’ 안에 가두었으며, 또 다른 피해를 용인하게 했지요. 가해자들에겐 죄의식 없이 만지는 행위나 희롱을 재미 삼아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었지요. 그런 사회에서 여자는 도시안에 세워진 거대한 성안의 이방인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성이 구축되면, 성의 권위 안에서 많은 사람의 의식은 그 성주의 사고와 행동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며 스스로 장님이 되어가는 모순을 보입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희롱도 용인되며 유머나 해학으로 치부됩니다. 그 안에서 낯선 여자, 신인은 이방인이 됩니다. 이방인이 도시인으로 편승 되기 위해서는 성과 성주의 규칙과 관습, 의식에 동화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잠재적 폭력이 존재합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 발언과 희롱을 용인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통 큰 여자, 이해심 많은 여자, 관계성이 좋은 여자 등으로 정당화되어 있었지요. 그것은 여성 성희롱에 대한 문화적 정당성의 확보였습니다. 그런데 일부 여성도 그것을 소탈함과 대담성으로 여겼으니 여성들도 한몫했습니다. 그런데 미투 운동이 수면에 가라앉았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잘못된 의식과 관행의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축과 문화적 정당성을 창조하여야 하는데 채 창조되기도 전에 수면에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관습적 전형(典型)을 파괴하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시대정신을 가진 자라 여깁니다. 그런데 여성을 만짐을 관행처럼 여기며 아무 죄의식 없이 즐기며 시를 썼다는 것은 시인의 ‘관습적 전형의 파괴’와 ‘관습적 전형의 즐김’이란 자기모순의 표출입니다. 특히 고은의 경우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권력화되면 거대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부패 되는 자기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자기모순을 스스로 정화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모순에 의해 무너집니다. 고은이나 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도 그런 예이지요. 모든 국가나 개인도 자기 안의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강성했던 국가나 영향력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결코 한순간의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쌓인 결과입니다. 특히 내부의 악마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다스리지 못하고 분열을 이룬 탓이지요. 심리학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내면에 괴물 하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행적으로 용인되고 즐기면서 외부로 표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자기 몫입니다. 작은 구멍 하나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듯이 내 안에 있는 악마적인 괴물은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고은은 그것을 단속하고 다스리지 못했지요. 한 국가의 멸망엔 최종적으로 내부의 적이 빗장을 열어주었듯이 한 개인의 추락도 내부의 적이 빗장을 열어줍니다. 어쨌든 아무리 거대한 성도 계기를 만나면 그 자체의 모순에 의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고은이란 거대한 문학적 성을 무너뜨린 괴물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자기 안의 양가적 감정과 자기 안의 괴물을 성찰하고 다스리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수치심의 해방과 분노의 표출을 넘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남녀관계, 성적 관계의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사입력 :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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