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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진달래꽃, 왜곡된 사랑과 이별에 대한 치유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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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기사입력 2019-04-09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엊그제 친구가 산행 중에 만개한 진달래꽃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습니다. 사진 속의 진달래꽃은 화려하게 군락을 이룬 것이 아니라,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낙엽을 비집고 피어난 꽃이었습니다. 드문드문 핀 꽃의 모습은 한가하지만, 외롭게도 보였습니다. 군락을 이룬 꽃들은 화려한 환희를 주지만, 고요한 느낌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는 왜 그런 꽃을 보냈을까? 나이 든다는 것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멀어져 가고, 삶은 고독해져 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한창 일할 때는 북적이는 사람 틈에서 군락을 이룬 진달래꽃처럼 화려했을 테지만, 이제는 주변에 북적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친구의 유일한 낙(樂)은 아침 먹고 홀로라도 산행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삶은 이별 연습입니다.

    

그날부터 나는 며칠간 김소월의 시집을 꺼내 <진달래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이별, 고독, 이별의 승화, 새로운 삶의 여정 등 다양한 생각을 했습니다.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입니다. 그런데 떠나는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지도 붙잡지도 않고 고이 보내드린답니다. 진달래꽃길도 만들어 드린다네요. 웬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그런데 김소월은 그런 식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월 시의 전문가들은 진달래꽃을 체념의 시, 승화된 이별, 역설의 미학 등으로 해석합니다. 어쨌든 이 시는 모든 이의 이별의 원형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충격입니다. 여기서는 이 시가 가진 심상을 깊이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별의 원형과 정서, 이별에 나타나는 행위를 생각해 봅니다.

    

전통사회에서의 이별은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사랑을 준 남성이 갑자기 이별을 통보해 오거나 말없이 떠나 버릴 때, 여인의 가슴은 찢어지고 깊은 상실의 세계에 빠져들지요. 가지 말라고 소맷자락을 붙잡고, 치맛자락에 기약이라도 해 달라고 애원할 것입니다. 수많은 밤, 떠나간 님을 그리다가 상사병이라도 얻어 님이 마음을 돌려 돌아오게 만들려는 심사도 있지요. 또 <아리랑>같이 ‘나를 두고 가시는 님을 원망하며 가는 길에 발병이라도 나서’ 가지 못하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원망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월은 그런 전통적 이별의 원형을 뛰어넘은, 아니 확 뒤집어 버린 이별의 새로운 원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시를 쓴 시기가 1900년대 초반인 전통사회인데도, 전통적 이별의 원형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이 시의 풍조로 보면, 이별을 당하는 사람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처럼 여겨집니다. 사실 소월은 어린 날에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결혼하는 바람에 사랑하던 옛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아픔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지요. 그것은 자신이 여성에게 가한 이별일 텐데 소월은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이별을 대하는 모습이 이상합니다. 떠나는 님에게 매달리고 기약을 다짐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다 가시는 길에 뿌려 꽃길을 만들어 드리겠으니> < 가시는 걸음걸음 즈려밟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뜹니다. 이별 때 모두가 흘리는 그 눈물은 아예 흘리지도 않겠다는 결심까지 보입니다. 평범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별 받아들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님을 절대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낼 수 없습니다. 보내고 나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는지 모릅니다. 떠나려는 님에게 매달리고 원망하기보다 차라리 <애원하지 않을 테니 편안히 잘 가라> 하면 마음을 고쳐먹고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심사였을까요? 위선이라도 좋습니다. 어쩌면 내면에는 내가 이렇게 모든 슬픔을 삼키고 애원하는데, 가기는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절대 가지 못합니다. 내가 가시는 길을 확 막아버릴 것입니다. 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요? 이별의 슬픔, 공포, 불안, 잠못이룸, 원망, 분노 등을 모두 숨긴 역설이 강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이별을 대하는 사람의 애절함이 어떻게 숨겨지고, 아픈 심연에서 녹아 재생되어 더욱 강한 숨결로 살아나는가를 강하게 느낍니다. 소월은 이별에 대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창조한 것입니다. 현대 문명사회를 사는 우린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데이트 폭력도 이별에 대한 대응 모습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이별 통보를 할 때, 그 분노를 못 이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흔히 데이트 폭력은 미혼의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나 위협을 말하지만, 최근에는 기혼의 남녀 사이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데이트 폭력은 연인이란 친밀관계로 인해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재범률도 76%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성적폭력, 감시, 통제, 폭언, 협박, 상해, 갈취, 감금, 납치, 살인미수, 살인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2015년 신고 접수된 것만 하더라도 7,692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1건 이상인 셈이지요.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문명사회에서의 왜곡된 사랑과 이별의 모습이지요.

    

전통사회에서는 사랑도 쉽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외부활동이 힘들었고, 연락도 쉽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고, 곡절 끝에 만나면 애절함 속에 주저하다가 손만 잡아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정조의 관념이 강해 남자도 여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성적인 행위에는 강한 책임감이 수반되었지요.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은 행위의 절제를 가져오게 했지요. 여인은 정조의 관념이 강하기에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일은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인에게 사랑은 삶의 전부를 거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화가 되면서 이런 것들은 소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남녀의 평등과 자유의 증대, 특히 성적인 자유를 선물했지요. 교통통신과 숙박 시절 등의 발달은 사랑의 시간과 장소와 방식을 자유롭게 변화시켰고, 이제는 순결이니 책임이니 하는 따위는 골동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만나는 일이며, 이별은 가슴 아픈 슬픔이 아니라 욕망의 식어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문명사회에서 사랑은 욕망의 자유로운 충족인지도 모릅니다. 여성이 주도는 이별도 많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 기반을 둡니다. 그래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차마 다칠까 걱정하며 보살피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육체가 우선이 된 사랑은 욕망의 합의인지도 모릅니다. 욕망은 대부분 소유와 유희에 기반을 둡니다. 그것은 상대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지요. 아마 오늘날 그토록 사랑한다던 사람과 결혼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이 급격히 늘어나는 경우도 사랑이 상대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 이별은 가슴앓이입니다. 이별을 당하면 상대를 원망하면서도 화살이 자기에게로 향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 가슴앓이를 견디지 못해 상사병을 얻고 심지어는 자살도 하지요. 바로 자학입니다. 상대를 해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떠나는 상대에게 복을 빌어주기도 합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중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별은 원망의 표출입니다. 나는 너에게 잘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그동안 주었던 선물 다 돌려받고, 안 되면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성적인 학대를 하기도 하지요. 그런 사랑에는 현대 문명의 특징인 거래와 소유와 욕망의 충족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물질과 소유와 욕망에 뿌리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별에 대한 가슴앓이가 아니라, 손해 배상을 청구하듯 분노의 표출로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문명은 성적인 자유를 주었지만, 소유와 욕망에 기반을 둔 왜곡된 사랑을 많이 양산한 것 같습니다.

    

문명사회에서 사람들이 사랑의 왜곡과 폭력적 이별을 행사하는 것은 성장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물질, 성적 자유, 소유와 욕망, 원망과 분노 등 자기 중심성 속에 가두어 타자를 상실하고 존중과 승화의 정서를 익히지 못한 탓일 것입니다. 또 정서를 깨우는 서정적인 시를 내면으로 읽지 못한 탓일 것입니다. 서정적인 시는 문명이 뿌린 야만성을 순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읽으며 사람들이 이별의 역설적 승화와 함께 진정한 사랑과 이별은 상대존중에 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문명은 야만의 탈을 벗어 던지고 인간적 모습으로 다가오리라 여겨집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현대인에게 왜곡된 사랑과 이별에 대한 치유의 메시지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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