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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지금은 《묵화(墨畫)》 같은 위로가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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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기사입력 2020-12-31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연말이지만 전국을 덮친 코로나 19로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를 높혔고, 사람들은 전국에서 발생하는 확진자로 두려움과 경계심이 가득하다. 계속된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웃과의 소통을 단절시켜왔고 ‘연말의 나눔’까지 ‘거리 두기’를 하게 했다. 한산한 거리에 자선냄비도 사라졌다. 보신각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과거 북적이던 연말연시와 새해맞이는 묵화(墨畫)처럼 적막함으로 채색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새해에도 계속되고 내년 연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60대 여성이 숨진 지 반년 만에 발견됐다. 숨진 여인에게는 발달장애가 있는 30대의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숨진 어머니 곁을 지키다가 전기와 가스가 끊기자 집을 나왔다. 노숙을 하던 몇 달 만에 자신을 돌봐 준 복지사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말했다. 발견된 어머니의 시신은 얇은 이불이 머리까지 덮고 있었다. 아들은 ‘파리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 우울한 소식은 우리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의 문제만 아니라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된 적막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사진 한 장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2020년 11월 26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유나이티드 메모리얼 의료센터에서 의사 조지 버론씨가 전신 방호복을 입은 채 코로나 19 환자를 안아주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 노인 환자는 추수감사절 기간에 치료를 받느라 가족을 만나지 못해 “아내를 만나고 싶다”며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의사 버론씨는 방호복 차림으로 노인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위로했다. 이 광경을 본 나카무라 씨는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이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할 수 있어 감사하고 연휴 기간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든 의료진에게 또 감사한다.”고 썼다. 버론씨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가 힘들어하는 것이 함께 슬퍼 서로를 안아줬어요. 모든 환자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버론씨는 올해 3월부터 268일간을 쉬지 않고 근무하여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지금도 휴식 권유를 뿌리치고 환자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2020.12.14.) 적막한 세상에서 한 폭의 밝은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힘든 세상, 한산한 거리, 이웃과의 소통도 단절되고, 서로 경계하는 적막함이 감도는 아픈 세상에서 유독 김종삼의 시 《묵화(墨畵)》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묵화(墨畵)

 

- 김종삼(1921~1984)-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이문재 엮음 『김종삼 시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38쪽-

 

 

이 시는 1969년 김종삼의 시집 『십이음계』에 처음 실렸다고 한다. 1969년이면 우리나라는 먹고 살기도 힘든 때였다. 아직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전통적인 농업사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는 도시화와 고도 산업화로 물든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시는 단 한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짧다. 그러나 시는 우리에게 매우 많은 언어를 전한다. 제목이 묵화(墨畵)지만 내용 어디에도 묵화(墨畵)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시 전체가 한 폭의 묵화(墨畵)이기 때문이다. 

 

묵화(墨畵)는 묵과 붓만으로 화선지 위에다 그린 그림이다. 묵화는 유화로 그린 추상화처럼 화려하지도 난해하지도 않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단순하면서도 담백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때로는 처절한 삶의 고뇌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런 묵화에는 평화와 안녕이라는 강한 염원도 숨어 있다. 김종삼의 시 《묵화(墨畵)》도 그렇다.

  

시의 장소는 소가 물을 먹고 있는 외양간이다. 외양간은 가장 서민적이고 농촌적이며 고단한 삶의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이다. 그러나 예수가 외양간에서 탄생하였듯이 삶이 탄생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장소이며 평화가 깃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 외양간은 바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서민들의 휴식 공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외양간마저도 없는 소들은 밖에서 자야 한다. 집이 없는 서민들도 밖에서 자야 한다. 집이 있다지만 단칸 지하 쪽방에 쪼그리고 자야 하는 사람들에겐 그 집이 포근한 잠자리가 못되기에 밖에 있는 소와 같다. 거리의 노숙자도 외양간 없이 밤이슬과 찬 서리를 맞아야 하는 소와 다름없다. 그러나 좁지만 자기 외양간이라도 있는 소들은 다행이듯이 자기 집이 있는 서민들도 다행이다. 지금도 이 땅의 수많은 낮은 곳의 사람들이 제대로 된 보금자리 하나 없이 저녁 휴식을 청한다.

  

다시 외양간의 풍경을 그려 본다. 옛날 우리 시골의 외양간은 안쪽에 소의 잠자리가 있고 그 앞쪽에 여물통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소죽을 끓이는 가마솥이 걸러져 있다. 그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에 식구들의 아침밥을 짓는 것 이상으로 정성스럽게 소죽을 끓였다. 소는 소중한 가족이었고 삶의 동반자였기 때문이었다.

  

시의 시간은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온 저녁이다. 저녁은 고단한 시간이다. 온종일 일을 했으니 고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녁은 비로소 먹고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평화의 시간이기도 하다. 어둠도 마찬가지이다. 어둠이 있기에 삼라만상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인간도 어둠이 있기에 휴식을 취하며 세상으로부터 독립되어 사색할 수 있다. 어둠이 있기에 삶을 성찰할 수 있으며 내일을 꿈꿀 수 있다. 어둠의 긍정적 의미는 휴식을 넘어 나만의 독립된 시간과 공간이다. 무간섭의 시간이며 꿈을 꿀 수 있는 안식과 평화의 시공간이다. 그래서 저녁이란 시간 설정은 고단한 서민의 삶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준다. 

 

시에서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라는 표현은 과거형이지만, 상황은 현재형이다. 지금 휴식하고 위로하고 충전하지 않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서민들에게 ‘할머니의 손이 소의 목덜미에 얹혀지는 시간’은 비로소 휴식하며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 출발점으로서의 현재형이다. 지나간 시간도 고단하였지만, 내일도 고단한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에 현재는 휴식해야 하고 함께 위로해야 한다. 

 

다시 시로 돌아가 소와 할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소는 노동의 상징이자, 소중한 가족이자. 가장 큰 재산이다. 소가 없으면 밭을 갈고 짐을 나를 수 없다. 소는 종일 서서 주인과 함께 힘겹게 일을 한다. 잠시 물을 먹을 시간도 부족하다. 때로는 멍에를 씌워 먹는 것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는 순박하다. 주인에게 순응하며 주인과 동고동락을 한다. 고단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할머니 역시 전통사회에서 노동의 상징이었다. 고관대작, 부잣집의 할머니는 그렇지 않겠지만 가난한 서민의 할머니는 평생 노동을 해 왔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 젊은 날 시집와서 아들딸 낳고, 시아버지 시어미니 모시며 모든 가사를 도맡았다. 가사뿐만 아니라 밭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등이 굽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자식들도 넉넉하지 못하다. 일을 해야지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지금도 이 땅에 그런 할머니는 넘쳐난다. 그래서 시에서 말하는 소와 할머니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은 주어진 생명에 대한 의무의 실천이기도 하지만, 그 실천의 길은 고단함을 딛고 서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세상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삶의 무게이다. 그러기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소와 할머니는 참고 견디는 인내의 상징이다. ‘황소걸음이 천리길을 간다’는 속담처럼 소와 할머니는 오랜 세월을 참아가며 노동해 온 삶의 궤적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소와 할머니와 같은 삶의 길을 걷고 있다. 살아있다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고단함을 이겨내며 종일 노동을 한다. 그것은 운명이요 업인지 모른다. 

 

시는 마치 결정적인 순간을 크로키 하듯이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는 한순간을 크로키 함으로써 전체를 이룬다. 나머지는 서술일 뿐이다. 그래서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의 손이 얹혀지는”순간은 소와 할머니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종일토록 함께 일했고, 수많은 세월을 함께 했기에 일심동체일 수밖에 없다. 서로는 마음의 교감이 이루어져 하나가 되었다.

  

소와 할머니의 일과를 상상해 보자. 소는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고 집에 돌아올 때는 짐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었을 것이다. 멍에가 씌어 있어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소의 목덜미에는 굳은살이 뭉쳤을 것이다. 소를 몰고 일을 한 사람은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소가 일하는 밭을 오가며 뒤를 돌보기도 했을 것이고, 종일 쪼그리고 호미질을 했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주름은 소의 목덜미에 굳은살만큼이나 겹겹이 쌓였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외양간에 들어간 소에게 할머니는 저녁 쌀을 씻고 난 쌀뜨물을 섞은 물을 먹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친 할머니는 손을 소의 목덜미에 기대듯 얹고 쓰다듬으며 토닥거렸을 것이다. 그 순간 시인의 눈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에 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둘의 교감을 읽어냈을 것이다.

  

할머니가 소를 토닥이면서 말한다. “오늘 하루도 우리 함께 잘 지냈구나.” 소가 대답한다. “그래요. 우리 함께 잘 지냈지요.” 할머니가 다시 말한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네. 참 수고했어.” 소가 대답을 한다. “그래요. 참 힘들었어요. 할머니도 힘들었지요? 이제는 좀 쉬세요” 또 할머니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너 발잔등이 부었구나.” 소가 응답을 한다. “그러네요. 할머니 발잔등도 부었네요” 

 

소와 할머니는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나눈다. 그런 할머니에게 소는 짐승이 아니다. 일군도 아니다. 소중한 가족이다. 소에게도 할머니는 삶의 동반자이다. 소와 할머니는 동시에 말한다. “세상이 왜 이리 적막하지요.” 그토록 힘들었던 소와 할머니의 세상은 저녁이 되니 고요하고 쓸쓸하다. 그래서 서로 위로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적막함은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소와 할머니는 노동과 힘겨운 삶으로 주름이 겹쳐져 있지만 강한 유대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습이다. 비록 삶이 힘들어 지쳐 있지만 서로 간에 진한 위로와 돌봄이 오고 가는 아름다운 관계이다. 삶에 찌들고 지쳐 있는 사람들도 서로 위로하고 돌봄이 오고 갈 수 있다면 누구나 아름다운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단한 저녁은 적막하지만, 안식과 평화가 깃드는 저녁이 되고 아침 햇살을 반갑게 맞이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은 참 각박해졌다.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코로나 19는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거리 두기와 영업 정지는 코로나 19를 이기는 것을 넘어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 간에 삶의 교감과 위로보다는 소통이 단절되고 서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도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너의 것이며 너에게 스쳐 간 것이 되고 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린 또 무엇인가의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도 그런 분위기에 물들고 있는 것 같아 소스라친다. 

 

정영수 단편소설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에서 주인공인 ‘나’는 늘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불길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와 오랜 친구인 유정의 집에 놀러 갔다. 유정은 얼마 전에 아기를 낳았다. 작고 예쁜 아기가 신기해 감탄사를 연발하던 ‘나’에게 유정은 아기를 한번 안아보라고 했다. ‘나’는 불안감에 아니라고 했지만, 유정이 계속 괜찮다고 하여 받아 안았는데 ‘나’의 손가락 사이로 담요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아기가 방바닥에 떨어져 질식했다. 아기는 병원에서 뇌 손상 가능성의 진단을 받았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는데 유정은 ‘너의 잘못이 아니고 단순한 사고였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마음에 결려 여자친구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좋아할 때도 ‘애가 아파 누워있는데 무슨 웃음이냐’며 구박했다. 여자친구가 ‘그럴 거면 가서 제대로 사과하라.’고 다그치는 바람에 ‘나’는 유정에게 가서 계속 사과하지만, 유정은 ‘제발 이제 사과하지 말라’고 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기를 떨어뜨린 사건에 대한 죄책감을 점차 잊어갔다. 그리고 아기가 그렇게 된 것은 그저 ‘내가 겪은 일’일 뿐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나’는 죄책감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나 중심주의’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가 ‘거리 두기’의 연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과정에서 이웃에 무관심한 것은 당연하며 나만 코로나에 안 걸리면 된다는 생각이 짙어지는 것 같다. 이웃의 파산이나 굶주림도 나의 일이 아니라 코로나가 ‘덮치고 간 사건’일 뿐이라 여기는 것 같다. 전쟁이나 큰 사건이 계속되고 심화 될수록 사람들 간의 유대관계는 약화 되고 이전 투구하기 쉽다. 코로나 초기에 마스크 사재기를 하였듯이, 또 미국 등지에서는 음식물 등 생활용품 사재기로 사투를 벌였듯이 코로나의 장기화로 인한 거리 두기의 연속과 영업 정지 등이 그저 ‘내가 겪은 일’이며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될까 두렵다.

  

그런데 실제로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코로나로 국민의 삶은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지고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데 정치권은 국민의 부은 발잔등을 보고 진심어린 위로는 커녕, 재난 지원금이란 돈 몇 푼 주고 서로 기득권 싸움에만 정신이 없다. 공수처에 사활을 걸고 법률안은 홍수 쏟아지듯 통과시켜 쏟아낸다. 무기력한 야당은 뚜렷한 대안도 없이 비난만 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전 국민의 유대강화보다는 내 편과의 유대강화에만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이 적막한 연말연시와 새해맞이에서 서로에게 손을 얹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위로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정영수 소설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에서처럼 ‘나와 상관없는 일’ ‘내가 단순히 겪은 일’로 치부하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어쩌면 나도 점차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김종삼의 시 《묵화(墨畵)》가 더욱 마음에 울림을 준다. 가난하고 힘들지만 지칠 대로 지쳐 있지만, 서로 쓰다듬으며 동반 위로를 할 수 있는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 땅의 정치인들에겐 그런 마음이 있을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와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의 소식은 얼어붙는 마음을 녹여준다. 위에 있는 높은 분들부터 그랬으면 좋겠다.

  

이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특히 정치인들부터 솔선하여, 할머니가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듯이, 서로에게 손을 얹고 이 하루도 함께 잘 견뎠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위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의사 조지 버론씨가 “아내가 보고 싶다”고 우는 노인을 감싸 안아주듯이 서로를 감싸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한정원 시인이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 41쪽)고 한 것처럼 우리의 작은 원을 그리고 넓혀 가는 일이 되리라. 정말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묵화(墨畵)》 같은 적막함 속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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