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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꽃》, 아름다운 공존(共存)을 향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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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기사입력 2020-09-03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9월이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올해 9월은 유독 마음이 무겁다. 8월 중순부터 다시 기승을 부린 코로나 19로 정부는 서울시에 9월 6일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를 발동하였고 서울시는 ‘천만 시민 멈춤 주간’을 선포했다. 코로나 19는 9월에 한풀 꺾인다 해도 언제 또다시 기승을 부릴지 모른다. 

 

지방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화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당분간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상은 포기해야 한다. 거리에는 발길이 끊기고 붐비던 음식점과 카페의 불빛도 어둡다. 이대로 오래가면 서민과 자영업자들의 삶은 도탄에 빠질 것 같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 19로 죽는 게 아니라 굶어 죽겠다.”

 

코로나 19의 위기 속에서도 정치적 갈등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국교회지도자 초청 간담회’에서 ‘특정교회에선 정부의 방역 방침을 거부하고 방해하면서 세계방역 모범국으로 불리던 한국의 방역이 한순간에 위기를 맞고 있는데도 적반하장으로 음모설을 주장하며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광화문광장에서의 815 태극기 집회 중심 세력을 작심한 듯 비판했다. 이에 맞서 사랑제일교회 측은 “슈퍼전파자는 문재인 정권”이라며 정세균 국무총리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고발하였고, 사랑제일교회와 태극기 집회 등이 이번 사태의 주범인지 “과학적 근거를 내놔라”면서 질병관리본부에 정보공개청구까지 했다.

  

코로나 19의 위기에서도 의과대학 정원 확대 등 정부의 의료정책에 반대하며 21일부터 무기한 집단 휴진(파업)에 들어간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정부의 ‘법안추진 중단’ 약속에도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파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여기에 가세하는 교수진들도 늘어가고 있다. 

 

거기다가 7월과 8월 두 달에 걸친 유례없는 장마와 폭우는 수많은 이재민을 냈다. 그 재난에 대해서도 ‘인재다. 자연재해다’ 하며 말이 많다. 이번 폭우와 관련하여 4대강을 두고 벌이는 정치적 논쟁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굿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워진 탓이다. 그런 속에서 이재민의 한숨은 커 가기만 한다. 

 

말 그대로 안개 속의 9월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가? ‘악몽의 9월’이란 말이 퍼지고 있다. 그 말의 중심에는 ‘불신과 갈등’이 꿈틀거린다. 모든 재난은 불신과 갈등의 틈새에서 커진다. 그리고 그 틈새를 키워 파국을 만든다. 불신과 갈등은 재난의 가장 위험한 숙주이다.

  

이렇게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 데에는 ‘나 중심주의’와 함께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짓밟으려는 폭력적인 이기주의와 정치적 패권주의가 있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위해 너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인식의 오류도 존재한다. 이런 때에 정치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함께 읽고 싶은 시가 있다. 바로 김춘수의 《꽃》이다. 

 

 

 

-김춘수(1922〜200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意味)가 되고 싶다 

 

- <이재복 엮음 『김춘수 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이 시는 내가 사랑한 시 중에서 으뜸이다. 나는 이 시를 고등학교 때부터 읽고 사랑해 왔다. 나의 삶과 철학적인 사고를 키워 준 시이기도 하다. 제자들과 지인들이 부탁한 결혼식 주례사 때 이 시를 낭송해 주기도 하고 신랑 신부가 한 연씩 낭송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부가 이 시를 늘 낭송하면서 시가 주는 의미를 새기고 산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이 시는 김춘수가 1959년에 출간한 시집 『꽃의 소묘』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보다 먼저 발표되었다. 1950년대는 김춘수가 타오르는 문학 정신을 발휘하며 문학계에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였다. 1952년 대구에서 설창수,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시 비평지 『시와 시론』을 창간했는데, 여기에 그는 시 《꽃》과 첫 산문 《시 스타일론》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 비평지는 창간호로 종간을 맞이하게 되었다.(이재복, “김춘수 시 해설” 『김춘수 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시는 총 4연으로 이루어졌다. 깔끔하고 물 흐르듯 하여 낭송하기도 편하다. 시에는 “나” “그” “이름” “몸짓” “꽃” “의미” 등의 시어(詩語)들이 등장한다. 그 시어들은 모두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친근한 일상의 언어들이다. 이 시어들이 절묘하게 배치되어 오묘한 사상과 삶의 법칙을 말하고 있다. 

 

첫째 연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에서 “그”는 누구일까? 사람일까? 사물일까? 시인은 모든 생명체, 사물, 형이상학적인 관념까지를 통틀어 “그”라는 언어로 표현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든 사물과 관념의 총체’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는 “이름”이 부여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저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이며, 발견되지 않은 것이며(그 발견은 인류 보편적인 발견만이 아닌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까지 포함) 인식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의미 없는 물상으로 단순한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산에 있는 나무들도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는 ‘그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무심코 지나칠 때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명명(命名)되고 기억될 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름없는 존재는 하나의 몸짓인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름이 없으면 기억되지도 않고 기억에서도 사라진다. 

 

우리가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여 불러주기 전에는 대상은 무의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사람도 이름 없는 사람은 무의미한 존재이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이름을 소중하게 불러주기 전에는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람은 소외되거나 고독한 존재가 된다. 부부가 서로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부부로 살지만, 쌍방 물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전에는 쌍방 물상에 지나지 않는다. 쌍방 물상은 무의미한 존재이거나 잊혀진 존재이거나 버려진 존재다. 그런 존재는 모두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왜 ‘하나의 몸짓’인가? 그 ‘몸짓’에는 현재는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는 ‘나’의 이름을 불러 달라는 ‘소통의 갈구’가 담겨 있다. 모든 사물은 이름을 붙여 주기를 바라며 그 이름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기를 바란다. 친구도, 부부도 상대에게 이름을 불러 달라고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몸짓”을 하고 있다. 우린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은 너의 존재를 부정함과 동시에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이름을 불러줌으로 존재가 확실해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대상은 내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의미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대상 또한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야 의미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것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심혈을 기울여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는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문장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존재가 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하려면, 내가 먼저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모든 관계의 법칙에서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어야 그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가온다. 부부도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정치와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야 그는 나의 파트너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장 12절)”는 말이 강조하는 ‘다가감과 받아들임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시의 중심 개념인 “꽃”이란 무엇이며 어떤 꽃일까? 모든 꽃은 아름답고 자기만의 향기를 풍긴다. 모든 생명체는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한다. 그래서 꽃은 아름다운 존재의 상징이다. 아름다움은 존재의 본질이다. 그래서 꽃은 존재의 본질이며, 사물의 존재에 맞게 부여되는 언어인 시(詩)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존재로서의 꽃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인지 모른다. 인간에게는 ‘천사 지향성’이 있다. 아름답고 선한 그 어떤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본성을 지녔다는 말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데아’의 세계를 끊임없이 쫓는 존재인지 모른다. ‘이데아’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아직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상상의 세계일 수 있다. 

 

시인은 어떤 꽃을 보고 이 시를 썼을까? 시인은 6.25 전란 중 통영중학교에 근무할 때, 해가 지고 교무실에 자기 혼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책상 위 유리컵에 꽃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이틀 후에 쓴 시가 《꽃》이라고 한다. 그때 책상 위의 꽃은 어떤 꽃일까? 꽃에 관한 그의 다른 시와 고향인 통영 등을 종합해 볼 때 ‘동백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맞는 것 같다. 그의 시 《처용단장》에서도 나오듯이 시인은 동백꽃을 ‘산다화’라 부르며 사랑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는 이유는 나도 그의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그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듯, 나도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한 것이다. 

 

여기엔 매우 중요한 존재와 관계의 법칙이 담겨 있다. 우선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이다. 어쩌면 ‘내가 준 만큼 돌려 달라’는 소망이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그를 아름다운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니 너도 나를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불러 달라는 것이다. 왜일까?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에는 나의 간절한 소망과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준 이유가 담겨 있다. 존재와 관계의 법칙에는 쌍방인정과 쌍방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불러야 소중하고 아름답게 불러주는 것일까? 그 방법은 바로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이 말에는 내가 먼저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빛깔과 향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존재만이 가진 개별성이며 본질적인 특성이다. 내 생각만으로 일방적인 예단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때 너의 개별성과 본질적 특성을 존중했으니, 너도 나의 개별성과 본질적 특성을 존중해 달라는 일종의 청원이다.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개별성과 특징이 있고,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의 개별성과 특징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고 아집과 편견으로 예단하고 만다. 그래서 오류를 범한다. 여기에는 모든 존재는 나의 편견과 아집을 떠나 있는 그대로 그 개별성과 본질적 특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존재 인식의 법칙이 숨어 있다.

  

이렇게 서로 이름을 불러줄 때 소중한 존재로 인정되고, 세상은 의미있게 된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절정을 이룬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意味)가 되고 싶다”는 것은 공존의 법칙, 그것도 아름다운 공존의 법칙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너, 세상 모두에게 소망하고 있다. 그 소망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하나의 의미(意味)가 되고 싶다”는 대목이다. 상당수의 인용 시와 시집에 ‘의미’가 아니라 ‘눈짓’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눈짓’보다는 ‘의미’라는 시어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 김춘수의 시전집과 위에 인용된 시집에서도 ‘눈짓’이 아니라 ‘의미’라 되어있다. ‘의미’는 ‘눈짓’보다 더 강하고 구체적인 존재의 세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 연에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意味)가 되고 싶다”고 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소망이다. 그것은 시가 추구하는 목표의 세계이다. 그 소망은 쌍방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함으로 진행되는 ‘질적인 변화와 성숙’이며, ‘한계 상황의 극복’이며 ‘막힌 세계의 뚫림’이다. 그리고 ‘영원성을 향한 창조’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존재와 발전을 향한 아름다운 공존의 법칙이다. 

 

세상에는 갈등과 다툼, 반목과 투쟁, 증오와 멸시가 난무한다. 그리고 온갖 재난과 고난이 엄습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생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공존하며 발전과 창조의 세계로 가기 위해선 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보듬어, 내가 먼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가감과 받아들임의 법칙’을 실천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가족 간의 갈등과 이혼율이 점차 늘어나고, 불신과 갈등 속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양분화되어 대립하고 있다. 거기에 재난까지 겹쳤다. 거기에 내가 먼저 상대의 이름을 불러주고 존재를 인정해 주는 다가감과 받아들임의 마음과 행동이 부족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감과 받아들임의 법칙’을 실천해야 한다. 그 마음과 행동은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충서(忠恕)와 같은 것이다.

 

마이클 루이스가 지은 『블라인드 사이드』(박중서 옮김, 북트리거)에는 흑인 빈민 소년과 백인 부유층 가족의 휴먼스토리가 나온다. 부유한 백인 가족은 길거리 갱이 될 뻔한 흑인 빈민 소년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연봉 수백만 달러의 프로 미식축구 선수로 키워냈다.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받아들임으로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여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에겐 젊은 날부터 ‘에드윈 스탠턴’(Edwin M(cMasters) Stanton, 1814〜1869)이란 정적이 있었다. 그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국가적인 재난”이라고 할 정도의 원수였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자, 그를 내각의 중요한 자리인 육군 장관에 임명했다. 참모들은 놀라면서 반대했지만, 링컨은 임명을 강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육군장관을 할 충분한 자질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난국(남북전쟁)을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는 소신과 추진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가 이 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당신의 친구로 만드는 것입니다.”(전광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생명의 말씀사)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 19, 긴 장마와 폭우로 인한 재난, 각종 사회적 불신과 갈등, 수많은 실업과 자영업자들의 도산, 정치적 진영 논리에 갈라진 국민, 거기에 거대 여당의 일방독주와 힘겨루기 등으로 국민이 혼란에 빠진 이때, 모든 국민과 정치인들이 김춘수의 꽃을 함께 읽으며 아름다운 공존의 법칙을 새기고 실천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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