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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연인들의 죽음》을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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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기사입력 2020-07-2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박 시장의 서울시장(葬)을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이 50만 명을 넘겼다. 그러나 2020년 7월 13일 박시장의 장례는 온라인 중계로 마무리되었다. 여권과 추종자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했으나 여성단체와 야당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고소인에 대한 신상털기 등으로 2차 가해를 가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박 시장은 그동안 청렴한 이미지로 여성 인권과 민주화운동을 해 온 인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런 그가 여비서 성추행 협의로 고소를 당하자 경찰의 조사도 받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떤 이는 ‘너무 도덕적으로 살려면 사고 난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음을 택했을까?’라고 했다. 그에게 성추행 피소 사실을 알린 자가 누구인지도 궁금해진다. 박 시장의 성추행과 자살이란 불미스러운 죽음을 두고도 정치적으로 갈라져 공과 과를 앞세우고 있다. 그런데 박 시장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미궁에 빠지고 있다. 어떤 죽음이든 의문의 죽음은 부검을 하여 사인을 밝히는 것이 상식인데 부검도 하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 

 

또 한 사람의 유명인이 죽었다. 6.25 전쟁의 영웅이며 한국군 발전의 증인이자 한미동맹의 상징이라 알려진 백선엽 장군의 죽음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 앞에서도 과거 그의 친일 흔적과 해방 이후 그의 활약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한쪽에선 백 장군을 대전현충원이 아니라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쪽에선 친일행위를 거론하며 대전현충원도 안되며 육군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가족들은 대전현충원으로 만족하니 논란을 거두었으면 했다. 백 장군의 죽음을 두고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공과 과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은 과거는 민주화운동과 사회봉사라는 칭찬을 받았으나 현재는 성추행이라는 불미스러운 혐의를 안고 자살을 했고 한 사람은 과거는 친일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으나 후에는 국가에 충성한 사람으로 천명을 다하고 죽었다. 인간의 죽음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죽음은 그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특히 자살은 논란과 파장이 더 크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당시의 그와 관련된 모든 혐의를 잠재웠으나 그 파장은 컸다. 노무현은 자살로 전설이 되었지만, 박원순은 전설이 되지 못할 것 같다.

 

죽음은 늘 인간에게 슬픔과 성찰을 가져오게 한다. 박원순 시장과 백선엽 장군의 죽음을 접하면서 샤를 보들레르의 시 《연인들의 죽음 La mort des amants》을 떠 올렸다. 그리고 죽음을 성찰하며, 죽음 앞에 선 우리들의 자화상을 돌아보았다.

 

 

《연인들의 죽음》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우리는 은은한 향기가 밴 침대를 갖게 될 거야

무덤처럼 깊고 기다란 소파를 

타국의 기이한 꽃들이 우리를 덮을 거야 

이곳보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열정, 그 열망을 불태워 

두 개의 심장 거대한 불꽃이 되면 

우리의 두 정신, 쌍둥이 같은 거울 속에 

두 배의 빛 비취리 

 

분홍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감도는 저녁 

우리는 서로의 하나뿐인 빛을 주고 받네 

긴 울음으로 작별을 아쉬워하며 

 

이후, 한 천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기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바랜 거울에 꺼진 불길을 소생시키리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문유림, 김대영 역, 알비)

 

이 시는 난해하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모든 시가 그렇듯이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외국 시를 원문이 아닌 번역문으로 읽는다는 것은 시가 갖는 본질적 특성을 곡해하기 쉽다. 그래서 번역 시의 시어를 번역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할 때가 많다. 그래도 여기선 번역자가 선택한 시어(詩語)에 충실하여 감상하고자 한다. 

 

이 시는 죽음을 예찬하는 것 같이 보인다. 시의 흐름을 보면 두 연인이 동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영혼은 시를 통해서 무덤 너머에 있는 모든 찬란한 것들을 엿볼 수 있다.”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그에게서 죽음은 오로지 시적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에게서 죽음은 물질과 모순, 온갖 난잡함이 깃든 이 세상에서 그 모든 아픔과 고난을 견뎌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그 숙명을 다하고 그런 것으로부터 떠나는 해방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관한 시는 죽음 예찬 같기도 하지만 모순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역설인지 모른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평생 시를 사랑하며 글을 쓰고 삶과 죽음의 세계를 고뇌하며 열정적으로 살았다. 

 

다시 시(詩)로 돌아가 ‘은은한 향기가 밴 침대, 무덤처럼 깊고 기다란 소파, 타국의 기이한 꽃들, 이곳보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에 주목해 본다. 은은한 향기가 밴 침대는 남녀의 진한 사랑을 위해 마련된 필수품이다. 무덤처럼 깊고 긴 소파(긴 의자)는 사랑의 열정을 태우기 전과 태우고 난 후의 휴식과 소통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타국의 기이한 꽃들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현실에 없는 상상 속의 아름다운 꽃들일 수 있다. 꽃들은 향연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는 지금 시인의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이다. 제1연의 분위기로 보면, 남녀의 진한 사랑을 위해 새로운 세상(죽음)을 예고한다. 그 사랑은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사랑인 것 같다. 초월을 꿈꾸는 사랑에는 ‘동반죽음’을 상상할 수 있다.

 

제2연에서 사랑은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남은 열정, 그 열망을 불태워” 연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열정을 하나도 남긴 없이 소진될 때까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두 개의 심장 거대한 불꽃이 되면” 연인은 완전한 합일에 이른다. 그러면 연인들의 두 정신은 “쌍둥이 같은 거울 속에서 두 배의 빛”을 비추리라. 연인은 거대한 불꽃으로 사랑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 불태움은 이제 작별의 아쉬움을 동반한다. 

 

어디로부터의 작별인가? 이승으로부터의 작별인가? 아니면 불타는 사랑이 지나간 후에 겪는 허탈한 아픔인가? 이 시각은 찬란한 빛이 떠오르는 아침이 아니라 “분홍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감도는 저녁”이다. 저녁은 작별의 시각이다. 어둠으로 가는 길목이다. 어둠의 세계는 죽음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저녁이다. 그 저녁은 황홀하면서도 두렵고 아쉽다. 그래서 둘은 긴 울음으로 작별을 아쉬워하며 서로의 하나뿐인 빛을 주고 받는다. 작별을 해야 하기에 긴 울음은 슬픔의 울음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것일까? 그러면 두 연인은 완전한 사랑을 위해 동반 자살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긴 울음을 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찬란한 빛과 희열을 노래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불미스러운 동반자살이었다면 그것은 축복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을 축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죽음 이후엔 “한 천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기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바랜 거울에 꺼진 불길을 소생시키리”라고 상상하고 있는지 모른다. 설령 연인이 동반 죽음을 택하였다고 하더라도 죽은 이후 천사가 충성스런 마음으로 그들의 꺼진 불꽃을 소생시키게 하려면 현실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신성(神性)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충동적으로 혹은 세상 도피를 위하여 택하는 죽음이라면 천사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꺼진 불꽃을 소생시키지 않고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연인들의 죽음》을 연인의 동반자살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동반자살로 생각하지 않는다. 동반자살을 하기엔 너무나 열정적인 사랑이다. 죽음 너머에까지 이를 만큼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죽음까지 불사할 만큼의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하게 이 시는 실행한 죽음이 아니라 상상한 죽음이다. 보들레르는 《가난한 이들의 죽음(La mort des pauvres)》에서도 고달픈 현실을 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죽음 이후에 얻게 될 휴식을 상상했다. 어쩌면 시인의 눈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고단한 현실을 사는 것이 안타깝고 측은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은 죽어야 끝나지’라고 흔히 말하듯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은 죽은 이후라야 끝나고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라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연인들의 죽음》도 죽음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은 죽음 후에 이룰 수 있다는 역설인지 모른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죽음(La mort des pauvres)》처럼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현실을 고뇌하며 견뎌내야 한다는 역설인지 모른다. 

 

구약성서 창세기 3장 19절에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고 했다. 흙먼지는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며 죽음은 그 흙먼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원죄를 지은 탓이니 땀을 흘려 일하고 명이 다할 때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명령이며 인간은 성실하게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만약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그 원죄를 다 갚지 못하는 것이 되며 온전하게 근원인 흙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신의 명령인 목숨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나의 영혼이여, 너는 장기간 붙잡힌 몸이었으며, 이제야 너의 감옥에서 떠나 이 육체의 장해에서 벗어나는 시기를 만났다. 기쁨과 용기를 갖고 이 이별을 견뎌라”고 하면서 죽음을 영혼의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았다. 영생론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육체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다. 그러나 영생론적 입장에서도 생존 시에는 고통을 감수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모든 죽음의 옆에는 남겨진 연인들이 있다. 그가 누구든 그를 사랑한 사람이 있으며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 상실의 슬픔을 간직하고 아쉬워한다. 그래서 죽음은 현존하는 인간이 겪는 최고의 비극이며 두려움이자 고통이요 상실이며 아픔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우린 그 숙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시인이 상상하듯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또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다시 만나서 “이곳보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꺼진 불길을 소생시키리”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탄생이 숙명이듯 죽음도 숙명이다. 모든 인간은 내 의지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는 난자와 정자라는 두 물체의 결합으로 이 세상에 왔지만, 그것도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나의 존재가 나의 의지가 아니듯 죽음도 나의 의지 밖의 것이다. 그래서 자살은 죄악이며 책임회피이며 신에 대한 항명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죽음은 존재의 상실이며 두려움이다. 현세에서 육신의 죽음은 인간으로서의 내 존재의 끝이며 사라짐이다. 남은 자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다. 그래서 죽은 자에게는 자기의 사라짐이지만 남은 자에게는 아픔과 숙제를 남긴다. 그리고 상실의 아픔을 이기며 성찰하게 한다. 가끔, 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어떤 명목으로든 가족이라고 해서 타인의 존재까지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의무론적 측면에서 죽음은 천명을 다하고 죽는 것이다. 천명을 다한다는 것은 주어진 생을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이다. 천명을 다해 성실하게 살다가 간 사람의 죽음은 축복받는다. 그래서일까? 천명을 다하고 가족과 친지들의 앞에서 고통을 받지 않고 죽는 것 즉 고종명(考終命-잘 죽는 것)이라 하여 오복(五福)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영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죽음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을 곡해하면 죽음을 찬양하고 동경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종교가 있다면 사이비이다. 영생론적으로 보아도 현 존재로서의 인간은 신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종교적으로 죽음을 신의 나라로 가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생할 것이라 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상 아직도 죽은 이후에 신의 나라로 가서 영생하고 있다거나 현 존재로 다시 탄생한 경우는 확인된 바 가 없다. 이 지구상에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나 그것 또한 현 존재로 부활하여 세상에서 현실의 삶을 누린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 부활이다.

 

모든 죽음은 남은 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래서 남은 자들은 죽음을 평가하게 된다. 유명인의 죽음은 때로는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유명인은 함부로 자살해서는 안 된다. 자살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의 종말이다. 그것은 신에 대한 항명이며 오만이다. 존재에 대한 자기 부정이며 현실 도피이며 책임회피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상에 빠진 동경이고 몰입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측면이든 의무론적 측면이든 영생론적 측면이든 자살은 죄악이다. 특히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자살은 비난과 오욕을 남긴다. 그러나 때로는 자살이 세상에 강력한 메시지를 주기도 한다. 자살은 대의명분에 의해서만 존중받는다. 그래서 자살은 남은 자에게 더 큰 아픔과 두려움과 논란을 남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살과 백선엽 장군의 천명을 다한 죽음과 그들의 삶의 궤적을 생각하며 삶과 죽음, 자살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샤를 보들레르의 《연인들의 죽음》은 죽음의 동경이 아니다, 연인의 감정적인 동반 자살은 결코 아니다. 완전한 사랑은 죽은 이후라야 가능하다는 사랑의 열정과 동경이다. 현 존재로서 완전한 사랑을 위해 죽을 만큼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역설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죽음은 상상할지언정 함부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올바른 상상은 현실적 삶을 더욱 열정으로 만들기도 한다. 삶과 사랑에 대한 열정이 없는 죽음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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