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검색

[시(詩)로 세상 읽기] 해체되어가는《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가 -가 +

이상호
기사입력 2019-09-27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 지난 추석 직전에 조상 산소 벌초를 위해 고향에 갔는데 이젠 정말 고향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 가족과 형제들은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인지라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일가친척들도 고향을 떠났기에 피붙이와 지인들이 없습니다. 지금은 벌초와 성묘 등을 위해 일 년에 세 번 정도 다녀옵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새로운 전원주택 두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집은 옛날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잣집의 바깥마당과 텃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 집 자녀들은 우리보다 먼저 객지로 떠났습니다. 그 집도 우리 집처럼 본채만 폐허를 향해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친척으로선 유일하게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는 늙으신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집 장사가 지은 집인데 타지인이 이사 와 살고 있답니다.

 

우리 옆집에 사는 노부부는 옛정이 있어 고향에 갈 때마다 음료수라도 사 들고 찾아보며 안부를 묻던 분이었습니다. 앞집도 사람이 살기는 하지만 상처(喪妻)를 한 노인이 늦은 장가를 가서 살기에 가끔 가는 저로선 서먹했습니다. 올해도 벌초를 끝내고 음료수를 사 들고 옆집을 찾았으나 적막이었습니다. 그 집 아저씨는 오랫동안 산소호흡기를 달고 지내더니 이제는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할머니가 출타했거나 먼 곳에 사는 아들이 잠시 데려간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료수만 방안에 두고 왔습니다. 고향 동네는 3분의 2는 빈집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도 80이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사람의 인기척이 없어 정말 허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을 마치고 쫓기듯 고향을 빠져나왔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고향의 쓸쓸한 모습이 떠올라 정지용의 시 고향을 되뇌었습니다.

 

고향

-정지용(19021950)-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시집(더 클래식, 2018)-

 

정지용의 고향1932년 동방평론에 실린 작품으로 3.1운동 이후 문화 통치라는 이름으로 민족개량주의를 부추겨 수많은 민족 지사들이 그들의 놀음에 속아 넘어가게 했던 시기입니다. 시인은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한 후에 고향을 찾은 모양입니다. 그때 그가 찾은 고향은 그의 시 향수에서 노래한 것처럼 어릴 적 뛰놀던 낭만의 고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고향은 여러 면에서 옛 모습을 상실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왜 고향이 아니라고 했을까요?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있습니다. 산새들의 울음소리와 나뭇잎들의 속삭임, 뒷산, 흰점 꽃의 모습 등 자연은 옛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옛날처럼 인정스럽게 시인을 반겨 주며 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니 마음속에 더는 고향이 자리 잡지 못하여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마음은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내가 그리던 그 고향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스스로 고향을 지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뿐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풀피리 불던 어린 시절은 그래도 고향의 자연과 삶의 모습이 여유 있고 낭만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고향은 풀피리 불던 어린 시절의 그 아름다운 추억과 낭만, 인정과 아늑함은 사라지고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합니다. 그러니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지 다른 모든 것은 낯선 것들입니다.

 

위의 시 고향은 총 6연을 각각 2행으로 배치하여 시적 안정감을 살렸습니다. 한 행이 3개의 소리마디로 나누어지면서 3음보를 형성하여 리듬감도 멋지게 살렸습니다. 2연과 4연에서는 옛 그대로의 변함없는 고향의 자연을 노래하였지만, 3연과 5연에서는 변해버린 고향에 대한 시인의 상실감을 노래하는 대조적인 구조를 통해 상실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연과 6연은 비슷한 내용과 어구가 반복되는 수미상관의 형식으로 주제의 의미를 살리고 있는데, 1연에서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면서 고향 상실에 대한 절망감을 강조하고 6연에서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고 하면서 고향 하늘의 항상성(옛 그대로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해체되어버린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워 고향에 돌아왔으나 고향의 황폐화로 그리던 고향의 심상(心象)은 사라졌습니다. 이는 고향 황폐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고향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 이는 고향 상실감입니다.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마음에 고향을 해체한 것은 첫째 일제의 수탈이며, 둘째 6. 25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이산가족, 셋째는 1980년대부터 급속하게 진행된 이촌 향도의 도시화 정책입니다. 특히 일제의 수탈과 만행은 처절한 고향 상실의 아픔을 강제화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마음에 고향을 품고 살길을 찾아 눈물을 머금고 떠나야 했습니다. 6.25도 일제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가 없었다면 분단과 6.25도 없었을 테니까요.

 

시인에게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그토록 강하게 느끼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명화란 이름으로 진행된 일제의 수탈과 마을의 파괴일 것입니다. 수탈로 인해 정든 이들은 살길을 찾아 떠나고 일제의 낯선 풍경만 보일 뿐입니다. 남은 사람들의 인심과 사는 모습도 변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품었던 고향은 해체되어버리고 안식처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니야 이건 내 고향이 아니야라며 스스로 고향을 지웠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 시를 발표했던 1930년대는 일제의 수탈과 만행이 극에 달한 후였으니까요?

 

정지용이 12세에 동갑내기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고,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으며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던 것을 보면, 고향을 떠난 것은 10대 중반입니다. 그리고 19234월에 교토의 도지사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29년 졸업하고 8.15해방 때까지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한 것을 보면, 그가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휘문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막 시작하던 때로 추정합니다. 그러니 고향에 대한 그의 추억은 10세 중반 이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이 훨씬 넘어 고향을 찾았으니 참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한 말에는 그에게 다가온 고향은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고향일 것입니다.

 

189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침탈과 지배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1910년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본격적인 수탈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순종이 발표한 일본 국 황제 폐하와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양국 간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일본 국에 병합함이 최선책이라고 확신한다.”는 합방조약 전문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병합 이후 일본의 만행은 더욱 철저했습니다.

 

구한 말 조선은 열강 특히 청러 등은 한반도를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에서도 부패와 수탈이 극심하고 개화와 수구 등 온갖 파당 싸움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은 정치적으로 유약했으며 관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사상과 이익에만 충실했었지요. 그중에 가장 침탈이 심한 일본의 움직임은 정말 심상치 않았습니다. 관리들의 부패와 외세의 침탈을 막지 못한 것에 분개한 농민들은 동학 농민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소망은 꽃으로 피지 못하고 우금치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여 이 땅의 원혼으로 잠들었습니다. 동학 농민군들은 1차 봉기하여 전주성을 장악했으나 청일에게 군사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 통치를 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조선의 문명개화란 명분을 내세우며 더욱 침탈이 노골화되었으며 최후엔 경복궁을 무단 침입하여 고종을 겁박한 후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문명의 탈을 쓴 갑오개혁(1894)입니다.

 

갑오개혁 이후 친러파는 아관파천(1896)으로 잠시 전세를 뒤집었지만, 열강은 조선의 모든 개발 이권을 챙겨갔지요. 그중 가장 악랄했던 것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침략을 위한 작업을 조선 문명화란 명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냥, 옷감(특히 옥양목), 쌀 등 모든 영역에서 대대적인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경제권을 손아귀에 움켜쥐었습니다.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열고 안간힘을 썼으나, 일 전쟁까지 승리를 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의 외교 국방 등 주요 권한을 빼앗았다가 1910년 드디어 한일합병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습니다.

 

특히, 이때 실시한 토지조사령과 임야조사령은 조선인의 삶을 뿌리까지 뽑아 버렸습니다. 당시 조선인에게 토지와 임야는 삶의 주 토대였으니까요. 본격적인 수탈을 위해 일제는 1912토지조사령이란 법령을 공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한 내에 그 주소, 성명, 소유지의 명칭, 소재지와 지목, 번호, 목표등급, 지적, 결수를 임시 토지 조사국에 신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 토지 조사 사업은 전국적으로 1918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일제의 토지 약탈의 만행은 이미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저당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유규칙과 국유미간지이용법을 만들어 국유지와 민간공동이용토지를 대거 빼앗았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현물출자라는 명목으로 11,000정보에 해당하는 정부 소유지를 빼앗아 단번에 최대지주의 자리에 오른 일제의 토지 약탈의 대명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진 것도 1908년입니다. 1910년 이미 일본인 지주는 2,254명이 소유한 토지 규모는 69,311정보였습니다.

 

일제가 당시 돈으로 2,456만 원이란 거액을 들여 토지조사사업을 한 것은 지세 부담을 공평히 하고 토지 소유권을 보호하며 매매와 양도를 원활하게 하고 토지의 개량과 이용을 자유롭게 하여 생산력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토지 약탈과 식민통치의 재정확보라는 엄청난 음모였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본 토지회사는 192020만 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했고 토지세는 1,1157천 원이나 되었습니다. 1918년 토지 조사사업이 끝날 무렵엔 3%의 지주가 토지의 50%를 차지하였고, 자작농은 20%, 소작농은 39% 소작농은 38%였습니다. 소작료도 57할이었으니 착취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전 국민의 80%의 삶은 처참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살길을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었고, 도시로 나가 일용품팔이로 전락 되었으며,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중국, 일본 하와이, 미국 등으로 떠난 수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1917년부터 1927년까지 일본노동현장으로 간 숫자만도 67만 명에 달하며, 일제에 의해 해외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무려 104만 명에 이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처참한 수탈이었고 고향 해체였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 반도와 조선인을 처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병합의 합법성을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힘없는 국민, 힘없는 민족의 설움은 단지 국가 상실의 슬픔만 아닙니다. 모든 국민의 삶을 뿌리까지 뽑아 버리고 노예 상태로 만듭니다.

 

지금 우린 한일간의 청구권 문제와 일제의 만행에 대한 피해배상 문제로 갈등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상과 배상의 차이점입니다. 보상(compensation)은 적법한 행위로 가한 재산상의 손해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제공하는 대가(對價)를 말하는 것으로 불법적 행위로 끼친 손해나 손실에 대한 대가(對價)인 배상(reparation)과 구별됩니다. 일본은 보상은 하였을지언정 배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불법이며 비록 합법을 가장했다 하더라도 무력으로 강제화된 것으로 역시 불법입니다. 일본이 지금까지 과거의 만행을 숨기고 역사를 왜곡하며 일제 통치가 조선 문명화를 위한 일이었다는 망언을 일삼는 것도 배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치졸함입니다.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사과를 하면 배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에는 배상의 책임을 묻는 일에도 국력과 외교력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우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 국제역학적 구조가 형성되었다거나 우리의 국력이 월등하게 나은 경우 숙여 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무역보복을 취하면서 당당한 것은 우리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도 산업기술과 자본 등 상당한 영역에서 우리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우린 대통령의 정치적 호언장담이 아니라 실질적인 면 즉 정치, 경제, 국방, 외교, 국민 통합의 모든 측면에서 일본을 이겨낼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고 사과하게 하는 일이며, 온갖 불법적인 만행에 대해 배상하게 하는 일임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나마 일제에 의해 해체된 고향을 되찾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쟁만 일삼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정지용의 시 고향을 읽으며 5천 년 이어온 고향을 처절하게 해체 시킨 일제의 만행과 수탈을 되짚어 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뻔뻔스러운 야만성을 봅니다. 지금도 도시화, 개발, 산업화, 등의 이름으로 고향은 해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성세대의 고향과 신세대의 고향은 다른 것 같습니다. 기성세대에게 고향은 어릴적 추억이 있고 부모님이 살았으며 가슴에 묻어둔 그리운 곳이지만 신세대의 가슴엔 고향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정서적 공동체로서의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는 것이지요. 지금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에만 예산을 쏟아 넣는 잘못된 국가정책에 의해 고향은 상대적으로 피폐해지고 해체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정서적 공동체인 고향을 살리기 위해 국가배상의 차원에서라도 <고향세>를 도입하고 고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향>5천 년 우리 민족의 혼과 정서가 숨 쉬는 단어이며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최신기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 뉴스파고. All rights reserved.